기아의 잡다한 생각 :: 고구려와 중화제국간의 문명대전

문명대전의 시작2011.07.29 11:15


고구려는 말기에 수나라, 당나라와 잇따라 대규모 전투를 8차례정도 벌이게 된다. 이 대규모 전쟁으로 인하여 동북아의

세력지형은 급격하게 변화하게 되고, 끝에는 당나라 마저도 흔들거리게 되고, 돌궐과 토번이 강성하게 된다. 당시 중국

전토를 통일하고 유목국가인 돌궐마저 복속시켰던 수나라는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다가 그만 멸망하게 된다. 당나라 역시 

고구려를 3차례나 침공하였고, 그 과정에서 백제가 멸망하게 되고, 결국 고구려마저 멸망을 하게 된다. 그러나 힘을 너무

쏟아부은 당나라 역시 돌궐의 부흥, 발해의 건국, 신라의 강성을 지켜보아야만 했으며 토번에게는 도리어 침공까지 받게

된다. 598년 수문제의 고구려침공을 시작으로 동북아는 근 100년간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전쟁의 시야를 중국과 한반도에만 집중시켰고, 이 전쟁의 여파를 제대로 깨닳지 못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와 중화제국

간의 전쟁은 동북아시아 전체를 뒤흔드는 엄청난 전쟁이었다. 당시 고구려와 수당의 인구는 많아야 6천만명일것이다.

고구려는 전인구가 거의다 동원되었을 정도고, 수당 역시 한번 전쟁할때마다 200만이상을 동원시켰다.(보급부대 포함)

적게 잡아도 700만 이상이 동원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인구를 최대 천만명으로 잡는다면 1,200만명이 동원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700만명으로 잡아도 인구대비 10%가 넘는 수치이다. 고구려는 이런 전투를 7~8차례정도 하였다. 그렇게

하고도 멸망의 순간에도 적에게 함락당한게 아니라 내부배반으로 평양성이 열리게 된다. 668년 마지막 전투에서도 고구려의

주요성들은 정상적인 전투로 함락 경우 별로 없었다. 신성,평양성, 국내성은 내부반란으로 열렸고, 부여성 역시도 신성이 배반

으로 떨어지고 기습적으로 당한것이었고 요동방어성들 역시도 대부분이 건재하였다. 대규모 전투를 8차례나 수행할려면

그 국가는 군사,경제,정치,문화적으로 안정적이고, 뛰어나야만 한다. 우린 이렇게 모든게 안정적인 국가를 강국이라고 부르고,

이들이 만들어낸 문화를 문명이라고 한다. 다음회에 언급하겠지만 중국은 그런 고구려를 질투하였다.  


                                  당시 고구려인들의 벽화수준은 최고봉이었다.



문화적 힘이 없었다면 고구려는 수당과 대규모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블로그에서의 주된 이유는 아마 고-수당

전쟁일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전쟁 이야기만 하지 않는다. 고구려 문명 이야기가 중간중간 나올것이다. 또한 고구려문명의 한계도

지적할것이다. 어쩌든 고구려는 당나라에게 패하였고, 그들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는다. 수나라 35년 역사책보다 고구려 700년

역사책이 더 얇다. 고구려  - 수당 전쟁을 통하여 고구려문명을 바라보고, 그 한계에 대해서 알아 보도록 하자. 

Posted by 위무제 조조